자장편 12장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자유왈 자하지문인소자
當洒掃, 應對, 進退, 則可矣, 抑末也.
당쇄소 응대 진퇴 즉가의 억말야
本之則無, 如之何?”
본지즉무 여지하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자하문지왈 희 언유과의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군자지도 숙선전언 숙후권언
譬諸草木, 區以別矣.
비제초목 구이별의
君子之道, 焉可誣也?
군자지도 언가무야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유시유졸자 기유성인호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이나, 손님 응대하는 일,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 등은 잘 하지만, 그런 것은 말단이다. 근본적인 것을 따져 보면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하려는 것인가?"
자하가 이를 듣고서 말하였다.
"언유(자유)의 말이 지나치구나! 군자의 도(道)에서 어느 것을 먼저 전하고 어느 것을 뒤에 미루어 두고 게을리하겠는가? 이를 풀과 나무에 비유하자면, 종류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하는 것이다.
군자의 도에서 어느 것을 함부로 하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갖추고 있는 것은 오직 성인(聖人)뿐이로다!
* 門人小子(문인소자): 제자 아이들.
- 小子(소자): '아이'라는 뜻으로 『논어』에서는 주로 공자가 제자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경시하는 느낌과 격의 없는 느낌을 주기 위하여 門人(문인)과 겹쳐서 쓴 것으로 보인다.
* 洒掃應對進退, 則可矣(쇄소응대진퇴, 즉가의): 물을 뿌려서 마당을 쓸고, 손님을 응대하고, 들어가고 물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괜찮다. 지엽적인 일은 그런대로 잘한다는 뜻.
- 洒掃(쇄소): 물 뿌리고 바로 쓰는 일.
- 洒(뿌릴 쇄, 뿌릴 새, 씻을 세, 엄숙할 선, 험할 최, 놀라는 모양 산): (물을) 뿌리다. 시원하다.
= 灑(뿌릴 쇄, 뿌릴 사, 나눌 시, 끊어지지 않는 모양 리(이))
- 應對(응대): 손님을 접대하는 일.
- 則(즉): ~로 말하자면, ~로 말할 것 같으면, ~는. 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사실의 대비관계를 표시하는 접속사.
- 進退(진퇴): 예의바른 몸가짐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
* 抑末也(억말야): 그러나 (그것은) 말단적인 것이다.
- 抑(억): 그러나. 역접관계를 표시하는 접속사.
* 本之則無(본지즉무): (그들이) 근본을 궁구함은 없다.
- 本之(본지): 근본을 추구하다. 근본적인 것을 따져 보다.
- 之(지): 일반적인 사실·사물·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사.
* 言游(언유): 자유. 言(언)은 성이고 이름은 언(偃). 자유(子游)는 자(字)이다. 주로 자유로 문헌에 자주 나온다.
- 游(헤엄칠 유, 깃발 류(유)): 헤엄치다. 유동하다. 뜨다.
* 先傳(선전): 먼저 전해 주다.
* 孰後倦焉(숙후권언): 어느 것을 뒤로 돌려 게을리할 것인가.
- 孰(숙): 사물을 묻는 의문대사.
- 後倦(후권): 뒤로 미루어 두고 게을리하다.
- 倦(게으를 권): 게으르다, 나태하다. 진력나다. 고달프다, 피곤하다.
- 焉(언): 의문의 어기를 표시하는 어기조사.
* 譬諸草木(비저초목): 그것을 초목에 비유하다. 그것을 풀과 나무에 비유한다면.
- 譬(비유할 비): 비유하다. 깨우치다, 인도하다. 깨닫다.
- 諸(저): 之於(지어)와 같다.
* 區以別矣(구이별의): 구획을 지어서 갈라놓다.
- 以(이): 而(이)와 같다.
* 焉可誣也(언가무야): 어찌 왜곡할 수 있겠는가. 교육해야 할 내용을 무시하고 안 가르칠 수 없다는 뜻.
- 誣(속일 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말하여 사실을 왜곡하다.
* 其惟聖人乎(기유성인호): 아마도 성인 뿐이리라.
- 其(기): 아마.
* 有始有卒(유시유졸): 처음도 있고 끝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한다는 것이다.
# 논어집주 해석
子游가 말하였다. “子夏의 門人小子(弟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며 應對하고 進退하는 예절을 당해서는 괜찮지만 이는 지엽적인 일이다. 근본을 미루어보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子夏가 듣고서 말하였다. “아, 言游의 말이 지나치다. 君子의 道가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며, 어느 것을 뒤라 하여 게을리하겠는가. 草木에 비유하면 종류로 구별되는 것과 같으니, 君子의 道가 어찌 이처럼 속이겠는가. 처음과 끝을 구비한 것은 오직 聖人이실 것이다.”
자유가 자하의 제자들이 威儀(위의)와 容節(용절, 용모와 예절)에 있어서는 괜찮으나 이는 小學(소학)의 지엽적인 일이요, 그 근본을 미루어 본다면 大學(대학)의 正心(정심) · 誠意(성의)와 같은 일은 없다고 기롱한 것이다.
‘倦(권)’은 〈〈述而(술이)〉편의〉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誨人不倦(회인불권)〕’의 倦(권)자와 같다. ‘區(구)’는 類(류, 종류)와 같다. 군자의 도는 지엽인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는 것도 아니요, 근본인 것을 뒤라 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배우는 자의 이른바(경지)가 저절로 천심이 있으니, 마치 초목에 대소가 있어 그 종류가 진실로 구별됨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이른바의 천심을 헤아리지 않고 그 익힘의 生熟(생숙, 설고 익숙함)을 따지지 않고서 한결같이 높고 원대한 것을 가지고 억지로 말해 준다면 이는 속이는 것일 뿐이니, 군자의 도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始(시) · 終(종)과 本(본) · 末(말)이 一以貫之(일이관지)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오직 성인만이 그러한 것이니, 어찌 門人小子(문인소자)들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정자(明道(명도))가 말씀하였다.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에 순서가 있어서 먼저 작은 것과 비근한 것을 가르친 뒤에 큰 것과 먼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 비근한 것과 작은 것을 먼저 가르친 뒤에 먼 것과 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말씀하였다. “灑掃(쇄소)하고 응대하는 것은 곧 形而上(형이상)의 일이니, 이치는 대 · 소가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다만 謹獨(근독)에 있는 것이다.”
〈정자(伊川(이천))가〉 또 말씀하였다. “성인의 도는 다시(애당초) 精(정)과 粗(조)가 없으니, 쇄소하고 응대하는 일로부터 의리를 정밀히 연구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관통(통달)하면 단지 한 이치일 뿐이다. 비록 灑掃應對(쇄소응대)의 일이라도 다만 그 所以然(소이연)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또 말씀하였다. “모든 사물에는 本(본)과 末(말)이 있으니, 본과 말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쇄소응대가 바로 그러하니, 〈여기에도〉 반드시 소이연이 있다.”
또 말씀하였다. “쇄소응대로부터 올라가면 곧 성인의 일에 도달할 수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정자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조항은 이 장의 글 뜻을 설명한 것이 가장 자세하고 극진하며, 그 뒤의 네 조항은 모두 精粗(정조)와 本末(본말)이 그 나뉨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동일하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순서를 따라 점점 나아가야 할 것이요, 지엽을 싫어하고 근본만을 찾아서는 안 됨을 밝히셨다. 이는 첫 번째 조항의 뜻과 실로 서로 표리가 되니, ‘末(말)이 곧 本(본)이어서 다만 말을 배우면 본이 곧 여기에 있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장편 12장 (논어집주, 성백효)
자유(言偃)는 공자보다 45세 연하의 제자로 자하, 자장, 증삼과 함께 공자에게 많은 아낌을 받았다. 공문십철 중 문학에 뛰어난 사람들로 자유와 자하가 있는데 그들은 경쟁관계로 학문의 견해가 달라 자주 비교되었다. 자유는 예(禮)를 가장 중요시하였다.
자유가 자하의 제자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사소한 예절(小學)만 배우고 있으니 정말 근본적인 것(大學, 내면수양 等)은 언제 배울 것이냐고 비판하였다. 그러자 자하는 군자의 도를 배우는 일이 작은 일과 큰일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작은 것부터 서서히 배워 익혀나가면 되는 것이지 한 번에 어찌 다 이룰 수 있느냐고 그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되받아쳤다.
군자의 도는 지엽적인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는 것도 아니며, 근본적인 것을 뒤라 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배우는 자의 노력여하에 따라 성취하는 정도를 봐야 한다고 하였다. 즉 큰일과 작은일을 미리 정해놓고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적절히 가르치되, 진정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의 자람을 보면 각각 알맞은 시기가 있어 종류에 따라 구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완전히 갖출 수 있는 사람은 성인 뿐인데 어린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말이다. 다 때가 있는 법!
학문이든 어떤 일이든 하는 이유와 목표를 알고 하는 것이 과정이나 결과를 가져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아무 생각 없이 왜 하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일의 효율이나 응용력 등이 떨어진다. 무조건 시키는 주입식보다는 이해의 바탕에서 시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배움에 있어 원칙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