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 11장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자질병 자로사문인위신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병간 왈 구의재 유지행사야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무신이위유신 오수기 기천호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차여여기사어신지수야 무녕사어이삼자지수호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차여종부득대장 여사어도로
공자께서 병이 심해지시자 자로가 제자를 시켜서 가신 노릇을 하게 했다.
병이 조금 뜸해지시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래되었구나, 유가 거짓을 행한 지가!
가신이 없으면서 가신이 있는 척을 하다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느냐? 하늘을 속이겠느냐?
또한 내가 가신의 손에서 죽기보다는 오히려 자네들의 손에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또 내가 비록 성대한 장례는 치러질 수 없다 하더라도, 길바닥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 子路使門人爲臣(자로사문인위신) : 자로가 문인으로 하여금 가신이 되게 하다. 당시의 예법에 의하면 현직 대부라야 비로소 가신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할 수 있었는데 충직한 자로가 공자가 한때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사실을 빙자하여 공자의 문인을 가신으로 삼아 장례 준비를 했던 것이다.
- 與其(여기)~無寧(무녕)~: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는 편이 더 낫다'는 뜻의 관용어.
- 臣(신) : 家臣(가신)으로 고대의 장례풍속 중 장례를 맡아 치르는 장의사. 현재의 장의사는 사람이 죽은 후에 장례를 준비하지만, 당시의 가신은 죽기 전에 미리 준비를 시작해 사자의 유품에서부터 염장까지 모든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 無臣而爲有臣(무신이위유신) : 제후가 아닌데 제후의 예를 쓴다는 뜻.
논어집주 해석
孔子께서 病이 심해지자, 子路가 門人으로 하여금 家臣이 되게 하였다.
병이 좀 차도가 있으시자, 말씀하셨다. “오래되었구나, 由가 거짓을 행함이여! 나는 家臣이 없는데 家臣을 두었으니, 내 누구를 속였는가? 하늘을 속였구나!
또 내가 家臣의 손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자네들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비록 큰 葬禮는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설마 죽어서 길거리에 버려지겠는가.”
夫子(부자)가 이때에 이미 벼슬에서 떠나 가신이 없었는데, 자로가 가신으로 喪(상)을 치르고자 하였으니, 그 뜻은 실로 聖人(성인)을 높인 것이나 높이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病間(병간)’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이다. 병이 심할 때에는 알지 못했다가 차도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아셨다. 그러므로 ‘내가 가신을 두어서는 안 됨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서 속일 수가 없거늘 가신을 두었으니, 이는 하늘을 속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속임은 이보다 더 큰 죄가 없는데 이를 끌어다가 自咎(자구, 자책)하셨으니, 자로를 꾸짖으심이 깊도다.
‘無寧(무녕)’은 차라리이다. ‘大葬(대장)’은 君(군) · 臣(신)의 禮葬(예장)을 이르고, ‘死於道路(사어도로)’는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져서 장례 하지 않음을 이르니, 또 굳이 그러할 필요가 없는 이유로써 깨우쳐 주신 것이다.
범 씨(范祖禹(범조우))가 말하였다. “증자가 장차 별세하려 할 적에 일어나서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꾸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름을 얻고 죽으면 그뿐이다.’ 하셨다. 자로가 夫子(부자)를 높이고자 하였으나 가신이 없어야 할 경우에 가신을 두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속임을 행함에 빠져서 죄가 하늘을 속임에 이르렀으니, 군자는 말과 행동에 있어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부자께서 자로를 깊이 징계하신 것은 배우는 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양 씨(楊時(양시))가 말하였다. “앎이 지극하고 뜻이 성실한 자가 아니면 지혜를 써서 스스로 사사롭게 하여, 무사한 것을 행할 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왕왕 속임수를 행하여 하늘을 속임에 빠지면서도 알지 못하니, 자로를 말함일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한편 11장 (논어집주, 성백효)
공자의 병이 깊어 자로가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공자는 가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겠다고 하신 대목이다.
자로가 제자를 시켜서 가신으로 하여금 장례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당시의 공자는 대부의 공직에 있질 않았기 때문에 가신을 두는 일은 법도에 어긋났다.
공자는 조금 병의 차도가 나아지자 제자인 자로가 예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는 꾸짖으며 경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공자는 가신을 두어서는 안 될 처지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예전에 대부벼슬을 했다고 하여 성대한 장례는 가당치 않다고 하셨다. 이는 결국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큰 죄임을 말씀하셨다.
공자는 자로의 출신이 미천하고 불운하여 속임수를 많이 쓰며 살아온 것을 알고 늘 주의를 주었지만 자로는 스승인 공자를 끝까지 잘 모시고 싶어 진심에서 우러나온 (비록 도에는 어긋나지만) 충성심에서 최선을 다해 병시중을 도왔을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과 14년간 떠돌이 생활할 때 자로의 도움으로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고 길거리에서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자로는 스승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당시의 사회상을 안타까워 했고 공자는 고지식하고 충직한 자로 덕에 객사하지 않고 집에서 죽을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공자는 자로의 의리와 인간적인 면을 사랑했다.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할 당시, 반란이 일어나자 살해를 당했다. 공자는 자로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제 명에 못살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자로의 시신이 젓갈로 담아 공자에게 보내지자 애통해하고 너무 상심한 끝에 공자는 결국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