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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필사

[126일 차]논어 제7편 술이 33장: 약성여인 즉오기감

by 스머프#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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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제7편 술이 33장

술이 33장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자왈    약성여인    즉오기감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억위지불염    회인불권    즉가위운이이의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공서화왈     정유제자불능학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成人)과 인인(仁人)이야 내가 어찌 감히 되겠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성인과 인인의 도리를 배우고 본받는 데 싫증 내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있다."
공서화가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저희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 爲之不厭, 誨人不倦 (위지불염, 회인불권) : '술이 2장'에  "학이불염, 회인불권'이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여기서의 위(爲)는 학(學)의 의미가 주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하다 [爲]가 배우다 [學]보다 포괄적인 의미임을 고려하여 '본받아 배우고 실천하다'라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누를 ) : 하지만, 그렇지만.

* 可謂云爾已矣 (가위운이이의) :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公西華 (공서화) : BC 509 ~?. 자는 자화(子華), 공서적(公西赤)이라고도 한다. 산둥성 조주(曺州)에서 태어났다. 공자 제자 중 나이가 많다 할 수 있는 제자인 자로(子路. BC 543~480)보다 서른세 살 어리고 공자 문하에서 그중 어리다고 말하는 증참(曾參, BC506~436)과 비슷한 연배이다. 공자보다는 마흔두 살 어리다. 논어에서 5번 등장하며 벼슬이름이 명시된 것은 없고 미루어보건대 외교적으로 뛰어난 제자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논어집주 해석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聖과 仁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하겠는가. 그러나 〈仁 · 聖의 道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이것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셨다. 公西華가 말하였다. “바로 저희 弟子들이 배울 수 없는 점입니다.”

이 또한 夫子(부자)의 謙辭(겸사)이다. ‘聖(성)’은 대인으로서 化(화) 한 것이요, ‘仁(인)’은 마음의 德(덕)이 온전하고 人道(인도)가 갖추어진 것이다. ‘爲之(위지)’는 仁(인) · 聖(성)의 도를 행함을 이르고, ‘誨人(회인)’은 또한 이 인 · 성의 도로 사람을 가르침을 이른다. 그러나 ‘싫어하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인 · 성의 도를 소유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조 씨(晁說之(조설지))가 말하였다. “당시에 夫子(부자)를 聖人(성인)이고 또 仁者(인자)라고 칭하는 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부자께서 사양하신 것이니, 만일 사양하기만 할 뿐이면 천하의 인재를 진취시키고 천하의 善(선)을 솔선할 수가 없어서, 장차 聖(성)과 仁(인)으로 하여금 虛器(허기, 빈그릇이나 빈자리)가 되게 하여 사람들이 마침내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비록 인과 성으로 자처하지 않으셨으나 반드시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으로 자처하신 것이다. ‘可謂云爾已矣(가위운이이의)’라는 것은 딴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公西華(공서화)가 우러러 탄식하였으니, 그 또한 부자의 뜻을 깊이 안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술이편 33장 (논어집주, 성백효) 


#126일 차 논어 제7편 술이 33장


     술이 2장에서의  "학이불염, 회인불권' 즉, 배우면서 싫증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는 문장과 같다. 배운 후에는 반드시 실천한다는 말과 함께 논어에서 자주 언급되는 공자의 말씀이다. 역시 학자다운 면모로서의 참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제자들 사이에서는 공자가 학문과 예 등을 타고 난 성인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지라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늘 겸손한 발언을 한다고 생각했지만(요즘에 그랬다가는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작 공자는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성인과 인인이 될 경지에 오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공자는 육예(六藝), 즉 예(禮 : 예의)·악(樂 : 음악)·사(射 : 활쏘기)·어(御 : 말타기)·서(書 : 글쓰기)·수(數 : 수학)  등을 모두 가르쳤다. 그야말로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한 것이다. 아버지인 무사였던 숙량흘을 닮아 2m (9척 6촌)에 가까운 장신에 체격도 좋아 무술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 시대의 건달이며 양아치 같았던 자로 [仲由, 季路]가 만만히 보고 공자에게 갔다가 한 번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기골도 장대하고 사람을 끄는 범상함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공자는 성인이라 칭할 만큼 타고난 인재였으며 정치에 관련된 모든 교육을 혼자 다 가르칠 수 있는 천재적인 스승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겸손했으며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가르침에 있어서도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선구자였다. 공자는 성인(成人)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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